서북청년단의 활동
미소공동위원회의 재소집과 관련하여 현재의 반탁시위 위협과 더불어 서북청년단의 최근의 테러행위의 증가는 미소공동위원회와 모스크바 외상회담의 결정에 반대하는 우익의 시위에 일정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극우 정치인을 지지하는 테러 단체인 서북청년단의 현재 위상과 배경을 재조명하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서북청년단은 1946년 11월 30일께 서울에서 공식 창립됐다. 이 단체는 전에 주로 북한에서 활동했던 4~5개의 청년단체가 통합된 것이다. 이 청년단체는 평안도 청년회와 함경북도 청년회, 함경남도 대한혁명청년회, 황해도 청년회 및 그외 몇몇 단체들이다. 이 날 서울 YMCA에서 열린 통합대회에서 축하연설을 한 인사는 다음과 같다. 김구가 주도하는 임시정부의 지도자 신익희, 조선민주당의 남조선 지도자 이윤영, 온건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의원 겸 국민회의 전 대표 최동오 등이다.
서북청년단의 주요 활동 목표는 완전독립을 쟁취하는 것이다. 이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활동계획’은 다음과 같다. (1) 38선 철폐운동 (2) 한국의 모든 청년운동의 통합 (3) 한국의 국제문제를 방해하는 음모자 제거 (4) 반역적인 친일세력 추방 (5) 남북한 통일을 위한 호혜적인 민족주의적 투쟁 (6) 한반도 통일을 저해하는 관료주의 철폐 (7) 언론, 종교, 집회의 자유 보호 (8) 국가경제의 안정화와 피난민 구조 (9) 국가방위를 위한 심신의 단련.
처음에 단원들은 모두 실질적으로 혹은 관념적으로 소련과 한국공산주의에 불만을 품은 북한 출신의 피난민들이었다. 북한에서 가족들이 투옥됐거나 능욕 또는 살해되고, 재산이 몰수당했던 것을 불평하는 이들은 공산주의와 유사한 어떠한 단체에 대해서도 극도의 복수심 섞인 적개심을 갖고 있다. (독립에 대한) 고귀한 이상을 상실하게 되자 이들은 ‘반민주적’이라고 의심되는 인사들에 대해 정력적으로 맹렬한 공격을 퍼부으며 ‘빨갱이 사냥’에 매달렸다.
이 단체의 성격을 가장 잘 나타내는 선언문은 1947년 4월 18일경 대전지부에서 쓴 문서이다. 이들은 문서에서 “애국청년들에 대한 소련과 공산주의자들의 학살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우리 서북청년들은 38선을 넘어 한국으로 왔다. 우리는 한국 전역에서 준동하고 있는 반역자들을 교화시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왔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선량한 사람들을 속이고 선동하여 테러와 폭력 속으로 몰아넣고 있으며, 특정단체의 통역자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또한 그들은 온갖 음모와 역선전으로 애국운동을 방해하고 있다. 이러한 행위는 용서받을 수 없다. 이후에도 그들이 그릇된 행위를 계속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행위를 중지시키기 위하여 그들과 싸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언한다.”
서울에 본부를 두고 있는 이 단체의 단장은 선우기성이다. 다른 지도자들로는 경기도 남부지역에서 조직을 이끌고 있는 임일이 있다. 그는 대전에 본부를 두고 있다. 이 외에도 선전부장 김성추, 부단장 장윤필 등이 있다.
서북청년단은 1946년 12월 미군정청 여론국에 전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단원 6,000여 명을 등록했다. 그러나 서북청년단은 현재 2,000여 명만 활동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관측자들은 이 숫자가 서북청년단의 전체 규모는 아니며, 테러행위를 하거나 시위를 벌이려고 할 때 그들은 ‘양지’후원자, 즉 동조적인 다른 우익을 동원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서북청년단의 가장 강력한 조직은 회원들 자신이 북한의 박해를 피해 국경선을 넘은 청단, 옹진, 연안 등과 같은 38선 상에 놓여 있는 지역에 집중돼 있다. 서북청년단은 이들 지역의 구호단체들과 밀접하게 연관을 맺으면서 남쪽으로 고난에 찬 여행을 떠나는 피난민들을 돕고 있다고 주장한다. 더욱이 그들은 여행자들을 심사하는 일과 정탐, 연락, 테러 등의 임무를 띠고 월남하고 있다고 추정되는 북한공산청년들을 체포하는 일 등을 함으로써 한국 경찰을 지원하고 있다.
이 단체의 비밀지하 지부가 북한의 모든 지역에 조직이 있으며, 단원들은 그 곳에서 공산주의를 전복시키기 위해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 남한의 지부들이 수행하고 있는 가장 활발한 활동 가운데 하나는 ‘북한에 현존하는 실제 상황’을 선전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 그들은 남한 전역에서 강연회도 열고, 보도용으로 신문사에 기사를 제공해왔다. 북한의 지하조직은 최신뉴스를 제공하는데 활용되고 있으며 또한 서울의 많은 회원들이 정보 수집뿐만 아니라 소식을 얻기 위해 38선 북쪽으로 자주 여행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들 청년들은 미국 정보수집기관과 협조적이며, 이들 기관이 흥미를 가질만한 정보를 적극적으로 찾고 있다.
타 우익단체와 서북청년단의 제휴 : 통합된 평안도 청년회는 이전에 조선민주당과 제휴했으며 현재 서북청년단을 이끌이 있는 선우기성이 대표였다. 그들은 소련에 의해 1년 이상 ‘연금’ 상태에 놓여 있으며 조선민주당이라는 우익의 명목상 지도자인 조만식을 가장 뛰어난 한국의 정치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으며 만일 그가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면 그를 적극적으로 추종하였을 것이다.
서북청년단은 1946년 12월 18일 이범석이 이끌고 있으며 군정의 후원을 받는 조선민족청년당과 합류했다. 그러나 서북청년단은 1947년 4월 12일 조선민족청년당이 이를 구성하는 다양한 단체를 합병할 수 없다고 선언하면서 탈퇴하였다. 이로써 서북청년단은 자신들의 활동 목적 가운데 하나인 우익청년의 통합체를 결성하는데 실패했다. 사실 서북청년단이 탈퇴한 이유는 자신들이 제안했던 조선민족청년당 최고위원에 선우를 임명하지 않은데 대한 질투심 때문으로 보인다.
이승만 : 1947년 1월 25일 임일은 지부를 결성하기 위해 전주를 방문하는 동안 미 방첩대 요원에게 서북청년단은 이승만 박사를 자신들의 고문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그가 명령만 내리면 시위를 벌이거나 봉기를 일으킬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정보원도 서북청년단이 미국과 일본, 중국에 대한 이승만의 외교 임무를 지원하기 위한 자금 모금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온 단체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1947년 3월 1일 이승만의 민족통일총본부는 워싱턴에 있는 이승만에게 서북청년단을 포함한 48개 단체가 이승만의 정책을 적극 지지하고 있다고 타전했다. 서북청년단은 미소공동위원회의 재소집에 대한 공식입장을 표명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선우 단장은 대화에서 서북청년단의 신탁 절대 반대라는 종전의 입장은 바뀌지 않았으며, 공동위원회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은 추후에 밝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언뜻 보기에 이런 모든 상황은 이 박사의 입장과 일치한다.
1947년 2월 27일 서북청년단은 임시정부 그룹에 의한 권력 인수 계획을 논의하기 위해 김석황의 자택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했다. 임시정부 그룹은 1947년 3월 1일 권력 인수를 계획했으나 미군당국에 발각되어 실패했다. 서울에서 발행하는 <현대일보>(극우)가 1947년 3월 25일자 기사에서 “서북청년단은 국민의회에 참여했고, 국민의회의 요인들은 김구의 임시정부 그룹을 지지한다”고 보도했지만, 서북청년단은 이 계획에 전적으로 찬성하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선우는 현재 국민의회와는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1947년 5월 10일 서울 서부지역에 (서북청년단의: 역주) 새 지부를 조직할 때 국민의회의 장익호가 축사를 했다.
이승만의 주도 하에 있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서북청년단에 상당한 지원금을 대여해 주고 있다. 일부 도에서는 이들 두 단체가 사무실을 같이 쓰기도 한다. 앞서 말한 임일은 대한독립촉성국민회가 그들을 지원하고 있으며, 기부금뿐만 아니라 식량과 피신처까지도 대한독립촉성국민회에서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서북청년단의 재정 상태는 다른 청년단체와 마찬가지로 불안정하며 회원을 제한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들은 자금을 모을 때에는 자신들은 북한에서 탈출한 사람들이라고 강조하면서 우익 정치가와 사업가들에게서 기부금을 모금하는 식의 흔한 방법을 사용한다. 또한 그들은 좌익 파업자들에 대항해 주는 대신 도움 받은 회사들로부터 자금을 받는다. 서북청년단은 1947년 4월 14일 그런 식으로 도움받은 남선전기회사 광주지사로부터 1만 엔을 요구했다. 돈을 가지고 월남한 피난민들을 38선에서 접촉했다. 선우는 서울의 서북청년단 본부를 운영하는데 매달 15만 엔 정도 들어갈 것으로 추정하면서 가능하다면 각 지부들도 자체 모금운동을 벌여 자립하려고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결론적으로 서북청년단은 조만식이 없는 상태에서 다른 우익단체들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나가기는 하겠지만 이승만 박사의 의지를 따를 것이다. 그들은 강력하게 ‘신탁’에 반대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승만의 지시에 따라 미소공동위원회에 협력하거나 아니면 반대시위를 벌일 것으로 예상된다. 서북청년단은 회원은 많지 않지만 극렬행동을 서슴지 않고 벌이며, 그 세력이 확장되고 있다. 그렇지 않다는 그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좌익 혐의자들에 대한 테러행위를 계속할 것이다. 단원들은 ‘반탁’ 시위를 벌여야 한다는 요청을 받으면 기꺼이 반탁시위대를 조직하는데 유용할 것이며 기꺼이 그렇게 할 것이다. 그들은 반미분자가 아니다. 그러나 한국의 행정은 한국인들에게 맡기도록 미군 철수를 계속 요구할 것이다.
XXIV CORPS G-2 W/S #92
c. Left Wing Propaganda.
A poster found on a telephone pole on CHEJU Island on 02 June 47 and signed by the South CHOLLA Province Committee of the South Korean Labor Party carried the sentiment of most of the propaganda and is extracted as follows:
"In order to do this (establish a unified democratic provisional government in KOREA): First, only the political parties which support the decision of the three ministers entirely and are ready to put it in practice should deliberate **. The terroristic parties ** should be exempt; Second, we should put into practice the principle of general equality and free elections **; Third, all the people should be given freedom of political activity and various democratic reformations, including the one on land, should be put into practice; Fourth, those democratic patriots who were rounded up and put into jail under the protonse of the dispute in October and the union strike in March should all be released immediately; Fifth, the pro-Japanese and pro-fascist which prevent the democratic independence of KOREA should be driven out completely from politics, economy, etc.; Sixth, In order to develop KOREA into a complete independent nation that will to able to stop the next foreign aggressor in case there is one, KOREA needs some economic and cultural help, but other help which the people do not demand should not be accepted.** Those subjects are the absolute terms for Korean independence and are faithful performance of the three ministers."
1. Civil Disturbances
SONGSAN (990-1140) (33°28'N - 126°56'E)
OG June 47 - Policemen in KUJWA MYUN, two miles north of SONGSAN, wore bouton and tied with wire while disbanding an illegal meeting of the SOUTH KOREA LABOR PARTY which was being hold on a tug at the seacoast. Those responsible have not been apprehended. (CIC radio, 090020/I)